Wondering-Revering-Immersed-Breakthrough
by 동우
도대체
인간 정신의 대상은 무엇인가?

인간 정신이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모든 것이 극히 혼재한다.

막연하고 아득하다.

by 동우 | 2009/11/11 16:06 | 사색공간 | 트랙백 | 덧글(2) |
Martin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

M.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

 

Lecture 10

 

하이데거의 사유의 도정에서 우리가 지나쳐야 할 마지막 길의 이름은 Eon Emmenai, 결국 “being : to be”이다. 우리는 이제야 진정으로 존재의 길로 한 걸음 내딛게 된다. 하이데거는 과연 being, “~으로서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묻는다. 책상부터 나무, 하늘까지 그 모든 것들이 being으로 지칭될 수 있지만, being에 대해서 말하라는 순간 우리는 잠시 ‘그 단어를 둘러싼 냉기’를 느낀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르메니데스가 다른 곳에서 자주 Emmenai로 Eon을 대신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Eon Emmenai를 Eon Eon로 바꾸어보자고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being : being 이라는 동어반복이다. 이 동어반복이 단지 강조를 위한 반복이나 중얼거림이 아니라면, 즉 진정 우리가 무엇인가 말하는 것이라면, being은 하나의 의미를 가지지 않고 적어도 양립할 수 있거나 나란히 쓰일 수 있는 두 개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이 존재의 길을 벗어날 수 있는 징표Sign는 주어졌고 우리는 그것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모든 징표Sign는 그 자체로 의미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매개자를 통해서만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문법을 매개자로 하여, being의 의미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being은 분사이고, 분사Participle는 명사적 의미와 동사적 의미, 그 두 의미를 가지고,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그 두 의미는 서로를 지시한다고 한다. 즉 Blossoming의 경우, Something that is blossoming의 명사적 혹은 실체적인 의미와, The act of blossoming 이라는 동사적 혹은 술어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분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Rather these words are participles because what they state it always applied to what is in itself twofold. Blossoming in its meaning as a nout designates a being that is blossoming. Blossoming in its meaning as a verb designates "to be in bloom." When the word is used in its nominal meaning, "something blossoming," it is no longer specifically stated that this something is, of course, a being; no more does the word "to be" find expression when the word "blossoming" is used as a verb. What is the upshot of all this?”

 

분사의 의미를 검토하면서 하이데거는 일단 분사가 명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그 분사로 지시받는 것은 더 이상 따로 그것이 존재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적한다. 더하여 하이데거는 분사가 동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이 있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한 번 크게 비약하여 being이란 다른 모든 가능한 분사를 자신 안으로 모으는 분사라고 하면서, being의 두 의미로부터 다른 모든 분사들의 두 의미가 비롯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크게 비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In keeping with that dual nature, a being has its being in Being, and Being persists as the Being of a being."

 

잇달은 두 번의 비약으로 하이데거는 길 위에서 우리를 한참 앞서고 있고, 우리는 그가 남긴 자취들에 조금 더 천착해보아야 한다.

 

Thus, our current distinction between nouns and action words, substansives and verbs, does not arise from grammar. Nor does it come out of logic textbooks. It comes to light for the first time, deliberately and laboriously, in one of the most profound dialogues Plato has left us, the "Sophist." The Latin term Participium is the translation of the Greek Methoxe. The taking part of something in something is called Methexein. This is fundamental to Plato's thinking. It designates the participation of any given being in that through which it -say, this table- shows its face and form (in Greek, Idea or Eidos) as this being. In this appearance it is in present being, it is. According to Plato, the idea constitutes the Being of being. The idea is the face whereby a given something shows its form, looks at us, and thus appears, for instance, as this table. In this form, the thing looks at us.

…… 'what is particular being in its Being?' The struggle to answer this unique question determines the fundamental character of the history of philosophy.

 

우리는 여기서 하이데거가 남긴 자취들을 모아볼 수 있다. Participle은 라틴어 Participium에서, Participium은 Methoxe로부터 유래하였다. 그 어원으로서 Methexein이란, 어떤 하나의 존재자가 어떤 것에 참여하여, 그로부터 이 존재자로서 얼굴과 형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현상 속에서 그것은 present being 속에 있고, 그것은 있다. 플라톤은 Idea가 존재자의 존재를 이룬다고 보았고, 주어진 사물들은 Idea에 참여하여 현상하고 특정한 사물이 된다.

being과 Being의 관계는 무엇보다 해석되어야 할 사태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한다, 혹은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 속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태이며, 그 사태 자체가 아니라 그 사태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비록 제시된 질문은 What-Question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태 자체일 뿐 사태에 대한 해석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그 질문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들이 "그 자신의 존재함 속에서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그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 재구성은 오직 양자의 관계를 통한 해석에서만 올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모든 철학적 문제는 여기에, 즉 존재하는 존재자들에 대한 해석에 달려있다. 사태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며, 플라톤은 이 문제를 개별 사물과 Idea의 관계로 해소하려고 하였다. 

플라톤의 경우를 보다 세밀히 살펴보면 개별 사물들은 Idea에 참여하여 스스로 ‘어떤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자는 존재에 참여하고 존재로부터 얼굴과 형태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얼굴과 형태로 우리에게 어떤 것으로서 드러나고 현상한다. 그리고 그 때에 그것은 present being 속에 있다. 즉 그것은 있다.


존재는 존재자를 그 속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에게 얼굴과 형태를 준다. 그리고 존재자는 그것들을 보이고, 그 모습으로서 바라본다. 누구에게 보이고 누구를 바라보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에게 드러나는 현상 속에서만 존재자들은 있다. 그리고 그 존재자들은 현상 속에서 언제나 얼굴과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그 얼굴과 형태를 마주한다. 그런데 마치 우리가 얼굴을 보고 서로를 알아보듯, 얼굴과 형태는 단지 있을 뿐인 존재자를 바로 그 사물로 만들어준다. 또 우리가 얼굴과 몸짓을 보고 사람을 이해하듯, 우리는 존재자들의 얼굴과 형태를 통해서 존재자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다. 현상이라고 불리는 이 하나의 사건 속에서 인간과 존재자는 만나게 되고, 인간은 존재자의 무엇임과 어떠함을 이해한다.

그리고 In this appearance it is in present being, it is. 우리는 여기서 it을 존재자, 즉 being 중 명사적으로 파악된 의미로 이해하고 present being에서 being은 동사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파악된 문장의 의미는 "이 현상 속에서 존재자는 그 현전의 존재하기 속에 있다, 즉 그것은 있다."이다.


present란 현전 혹은 ‘바로 지금, 여기에’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현상 속에서 자신의 얼굴과 형태를 드러낸 존재자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즉 그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여기서 얼굴과 형태가 존재자 그 자체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존재에 참여하여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것은 있다. 즉 ‘it is’의 의미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it is란 존재자가 현상 속에서 인간을 마주하여 얼굴과 형태를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단정적으로, 독립적으로, 필연적으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있음의 사태 자체에는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이 있다’는 규정은 의미를 넘어 사태 자체를 지시하게 된다. 더하여 그것은 present, 즉 현전하는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결국 존재자는 존재를 통하여 자신의 얼굴과 형태를 얻어 현상하고, 인간은 존재자의 드러남을 통하여 그들을 이해하지만, 이 드러남과 이해가 교차하는 순간 존재자는 자신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그렇지만 여기서 애초에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밝히려던 시도가 마치 자신의 길에서부터 멀어져 존재자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기된 사태를 뒤집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존재자는 어떤 존재자로서 나타나서 자신의 의미로부터 인간에게 현상한다. 그러나 현상하지 않는 존재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에게 어떤 것으로 드러난다거나, 인간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는 무의미의 존재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게 어떤 것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인간으로부터 의미도 부여받을 수 없으므로, 얼굴과 형태를 가지지 않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얼굴과 형태는 존재자가 존재에 참여하여 존재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므로, 현상하지 않는 존재는 결국 존재에 참여하지 않는 존재자이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인간, 존재자, 존재의 관계는 여기에서 불명확하게나마 간취할 수 있다: 존재자는 존재에 참여함으로써만 인간에게 현상하고, 결국 있다.

 

우선 being이라는 분사가 가지는 의미의 이중성(명사적, 동사적 의미)는 Methexis를 통해 존재와 존재자(존재 속의 존재자)의 이중성으로 변형되었다. 일견 명백한 사실은 ‘존재에 있어서 파악된 존재자’라는 것은 ‘동사적 의미의 있기로부터 조망된 명사적 의미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마지막 강의에서 제시한다.

 

 

by 동우 | 2009/11/09 15:07 | -/책과 생각 | 트랙백 | 덧글(2) |
The Way
길, 길이 다르다.



생각하기는

날카롭게 폐부를 찌르는 것일 필요도,

모든 것을 한 손에 움켜쥐는 것일 필요도 없다.


다만 생각하기는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고,

모든 것을 아울러,

대지의 공명을 하늘로 보내는 일이다.


길, 길이 다르다.

노심초사 할 것 없다.
by 동우 | 2009/10/26 20:19 | 트랙백 | 덧글(0) |
태도
입다물고 성실하게 사뿐사뿐



인정할수밖에 없게 한다.



by 동우 | 2009/10/19 00:46 | -/삶의조각,감정 | 트랙백 | 덧글(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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