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dering-Revering-Immersed-Breakthrough
by 동우
Beethoven, Piano Sonata 23 Appassionata
단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음악을 한 편 들어보고 싶었을 뿐이고,

지식이 일천하여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를 고민하다가

'베토벤'을 검색하여 처음으로 듣게 된 곡.


지금 하는 생각은 "이 곡처럼 살아야 겠다"는 느낌 뿐이랄까


by 동우 | 2010/01/29 21:27 | 트랙백 | 덧글(3) |
잊을까봐
우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안에서 지성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다루는 초월적 분석학은 개념의 분석학, 원칙의 분석학으로 나뉜다.


 이 때, 개념의 분석학은 1)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순수지성개념을 유추해냄, 2) 순수지성개념들이 순수지성개념들이 직관된 바에 적용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초월적 연역으로 나뉜다. 여기서 "순수지성개념들을 얻어내겠다"는 개념의 분석학의 대목적에 따라보건대, 중점은 1)에 놓여야 할 것이나, 실상 개념의 분석학의 중점은 분량, 논증의 엄밀성 어느 모로 보나 2)에 놓여있다. 그런데 2)에서도 범주들이 왜 직관된 바에 적용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논증이 매우 간소한데 비하여, 정당한 영역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공을 들여 증명하고 있다. 오히려 전자가 주요하게 증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으나, 칸트는 이 논증을 매우 간소히, 그래서 그 타당성도 약간의 의심을 남겨두는 정도로 진행해두고 있을 뿐이다. 즉, 직관에 의해 형성된 표상들이 나의 표상이라는 것은 자명한데, '나의 표상'이라는 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자 '나의 표상'에 수반하는 표상으로서 "나는 생각한다"는 초월적 통각은 '자발성'이고 '수용성에 기반한 직관'에는 속하지 않으므로, 지성의 유일한 기능(function, 함수)인 12범주가 이 종합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후자에 대한 칸트의 증명은 매우 엄격한데, 초월적 연역을 읽다보면 오히려 칸트가 이것을 위하여 초월적 연역을 썼다고 말하게 될 정도이다. 이에 대해서는 간략히 초월적 연역의 가장 중요한 명제 두 가지로서 "범주는 경험의 대상에 대한 범주의 적용 외에 사물에 대한 인식을 위한 다른 어떤 용도도 가지지 않는다"는 22절 명제나, 26절의 제목인 "경험 속에서 순수지성의 보편적으로 가능한 사용의 초월적 연역"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바이다. 칸트의 초월적 연역의 주요 논점은 오히려 "순수지성개념의 정당한 적용영역"을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할 수 있다.


 한편 원칙의 분석학은 인식의 기능으로서 광의의 지성 안에는 협의의 지성(개념과 상응), 판단력(판단과 상응), 이성(추론과 상응)이 있다고 하면서, 이성은 "추론능력"이고 추론이란 대상이 무엇인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므로 >분석학<의 다룰 바가 아니라고 하고, 오직 진리의 분석학에서는 "판단력"과 판단의 원칙들만을 다루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칸트는 판단력이란 "어떤 것이 주어진 규칙 아래 놓이느냐 놓이지 않느냐"를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칸트는 다시 판단의 도식기능을 다루면서 내적직관 일반의 형식인 시간을 매개로 하여 순수지성개념과 직관내용이 어떻게 상응할 수 있는지를 보이고 있다.

 
 위와 같다면, 개념의 분석학에서 >지성<개념은 광의의 지성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판단력이 "어떤 것을 주어진 규칙 아래 종속시키는 능력"이라면, 그것은 순수지성의 구성요소로서 지성개념의 사용법칙을 온전히 구사되는 방식, 즉 "순수지성개념이 경험대상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다루는 것이고, 따라서 순수지성개념이 경험대상에 적용됨을 전제로 하여 적용방식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적용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것은 곧바로 어떤 방식이 올바른 방식인지를 보이는 것과 연결되기도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판단의 진위여부는 순수지성개념을 통해 인식한다는 것 자체에 달려있다기 보다는, 그것을 전제로 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렸는지에 달렸다.
by 동우 | 2010/01/09 06:28 | 사색공간 | 트랙백 | 덧글(3) |
의미구성에 관한 두 가지 언급의 차이
비트겐슈타인, 데이비드 피어스

1. 명제 "P"의 실재에 대한 요구 때문에 실재는 적절한 논리적 공간에서 P가 아닌 구역으로부터 나가 P구역으로 밀려들어가게 된다.

2. 사실적 명제는 실재를 통하여 의미를 얻기 때문에 실재와의 관련을 확립하기 위해 이 점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by 동우 | 2010/01/08 23:21 | 사색공간 | 트랙백 | 덧글(0) |
내용과 형식
우리는 많은 것들을 

그 내용과 형식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도대체 모든 것들에는 내용과 형식밖에 없을까?

아니, 모든 것들에는 내용과 형식밖에 없다기보다

우리는 내용과 형식 외에 제3의 것을 추가하여 새로운 구획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인가 하나 혹은 둘 혹은 그 이상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의미라는 것은 내용일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상식에 크게 반하는 것이지만 혹시 의미는 형식일까?

아니면 의미는 제3의 무엇일까?



구조라는 것은 무엇일까?

형식일까? 내용일까? 아니면 제3의 무엇일까?



도대체 구조가 의미를 결정한다거나, 구조는 형식에 불과하다거나

구조적으로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고 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선

내용, 형식, 구조, 의미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획-분석-종합에 대해 알아야 한다.

무엇을 하나로 파악할 수 있고, 무엇을 여러 개로 파악할 수 있고

무엇을 복합체로, 무엇을 단일체로 파악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미지즘 시"라고 할 때, 이것은 '감각의 편린들을 그 내용으로 하는 운문의 형식을 가진 글'이라고 말한다면

'글'이라는 어떤 것(복합체? 단일체? 구조화된 일체 뭐라고 명하든)을 두 부분으로 쪼개어낸 것인가?

아니 근데 이것이 쪼개어질 수는 있나?

의미는 뭐지? 구조는 뭐지? 뭐지 뭐지??
by 동우 | 2009/12/29 22:28 | 사색공간 | 트랙백 | 덧글(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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